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피터 린치 (문단 편집) === 마젤란 펀드 === 70년대 중후반, 펀드의 인기가 얼마나 없었는지 기존 마젤란 펀드의 운용액은 겨우 6백만 달러에 지나지 않았다. 이에 피델리티는 또다른 인기 없는 펀드(1천2백만 달러 규모)와 마젤란을 합친 뒤, 그 당시 젊은 애널리스트였던 린치에게 이 펀드의 운용을 맡겨버렸다. 그런데... '''1977년부터 1990년까지 피터 린치의 [[마젤란 펀드]]는 연평균 29.2%라는 엄청난 수익률을 기록했다.''' 무지막지한 실적에 명성이 높아지며 마젤란 펀드는 가입하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뤘고, 펀드 운용액은 린치 휘하에서 1800만 달러에서 140억 달러로 무려 660배나 증가해 세계 최고의 펀드로 우뚝 솟게된다. 그의 유명한 종목들로는 [[패니 메이]], [[포드 모터 컴퍼니]], [[크라이슬러]], [[던킨도너츠]], [[필립 모리스]], [[타코벨]], 헤인스(Hanes), 라퀸타(La Quinta), 스탑앤샵(Stop & Shop) 등이 있다. 그는 소형 지방 은행들(S&L banks)에도 많이 투자하여 큰 수익을 냈다. 보다시피 린치는 첨단 기술주 및 신산업주보다는 자신이 잘 이해할 수 있는 기업에 투자하였다.[* 그의 가장 유명한 모토 '아는 것에 투자하라(Invest in what you know)'] '유연성(flexibility)'이야말로 린치의 투자 핵심 중 하나였다. 그는 금융, 자동차, 화학, 철강, 소매업, 편의점, 음식료, 섬유 등 산업을 가리지 않고 저평가된 곳에 투자하기를 즐겼다. 초창기 펀드 규모가 무척 작았을 때부터 린치는 펀드의 특성과 관계없이 자신이 원하는 종목을 자유롭게 매입할 수 있었다. 또한 주식을 매입해놓고선 계속 보유할 변명거리를 찾기보다는, 더욱 저평가되고 전망이 좋은 종목을 공격적으로 찾아다녔다. 그리고 다른 펀드매니저들이 선뜻 매수할 마음이 들지 않는 종목들 - 따분한 업종이거나, 우스꽝스러운 이름이거나, 전혀 멋지지 않아보이는 사업모델 등 - 을 선호했다. 심지어 주식 펀드임에도 불구하고, 80년대 초 국채 금리가 13-14%를 넘나들때는 과감히 가장 크게 비중을 싣기도 했다. (물론 특수한 상황이며, 평소에 린치는 주식을 채권보다 훨씬 선호한다.) 이윽고 펀드의 규모가 점점 불어나자 회의론자들은 마젤란 펀드는 '성공하기엔 너무 커져버렸다(too big to succeed)'라고 수근거리기 시작했다. 실제로 펀드의 덩치 때문에 린치는 80년대 중반 이후론 초창기와 같은 공격적인 매매는 쉽지 않게 되었다. 대신 그는 더욱 많은 발품을 팔며 수백, 수천 개의 기업들을 훑고 다녔다. 해외로도 눈을 돌려 저평가된 외국 기업에 투자하기 시작했으며, [[볼보]] 같은 기업도 이때 발굴하게 되었다. 심지어 [[일본]]의 철도 주식으로도 좋은 수익을 올렸다. 1987년 가을의 대폭락을 겪은 린치는 이후, 교훈을 얻어 현금 비중을 10%로 늘렸다. 펀드 초창기에 바닥재 회사와 타코 회사를 매수했던 그가 은퇴 즈음에 주로 매수한 업종은 보험과 제약, 방산 회사 등이었다. 역시 저평가된 좋은 기업이란 점 이외엔 전혀 공통점이 없는, 린치다운 운용이었다. 여담으로 마젤란 펀드에 투자한 투자자 중 과반이 오히려 돈을 잃었다고 한다. 펀드의 수익률이 높아지면 허겁지겁 펀드에 가입하고, 수익률이 낮아지면 실망해서 환매해버리는 단기대응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펀드의 덕을 본 사람도 많았는지, 훗날 린치가 은퇴할 때 뜨거운 격려와 감사의 편지가 미국 전역에서 쏟아졌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린치는 마젤란 펀드를 운용하며 큰 부와 명성을 얻었지만 펀드매니저 생활이 힘들었던 모양이다. 저서에서 (비록 일 자체는 사랑했지만) 과도한 업무량에 '무지 힘들고 괴로웠다!'고 몇 번 언급한다. 천성적으로 부지런했던 린치는 1400개가 넘는 종목을 보유하였고, 연간 4-500개의 기업을 방문하거나 미팅을 가졌으며, 늘 새로운 종목을 미친듯이 찾아다녔다. 얼마나 일 중독이었는지 은퇴 직전에 한 인터뷰에선 '일주일이 9일로 늘어난다면 좋겠지만, 난 어차피 그럼 8일을 일하고 있을 것'이라고 농담할 정도였다. 결정적으로 2천 가지도 넘는 종목코드는 외웠지만 딸 아이의 생일을 기억해내지 못하는 사실에 충격을 받고, 가족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자 1990년, 46세의 이른 나이에 은퇴한다.[* 공교롭게도 린치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나이 역시 46세였다.] 현재는 피델리티 매니지먼트의 컨설턴트이자 부회장으로 지내며, 주로 젊은 주식투자자들과 연구자들을 교육한다. 린치 재단을 세워 자선행사도 열심히 하고 있다. 2015년 아내 캐롤린 린치가 사망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